전체 글40 류성룡과 『징비록』 – 전쟁에서 얻은 교훈 기록 임진왜란은 조선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던 총체적 위기였다. 류성룡(1542~1607)은 그 한복판에서 영의정‧도체찰사로 전쟁을 지휘했고, 전란이 끝난 뒤 『징비록(懲毖錄)』을 남겨 실패와 교훈을 정밀하게 기록했다. 제목 그대로 “지난 과실을 징계하여 훗일을 삼가라”는 뜻 이 책은 개인 회고를 넘어 국가 시스템 점검서이자 재난 대응 매뉴얼이다.학문적 갈등의 서막 – 왜 무너졌는가류성룡의 진단은 가차 없다.첫째, 정보의 정치화. 왜국 동향과 국경 경보가 붕당 논쟁 속에 묻혔다. 경계가 무너지자 초기 대응은 혼란으로 치달았다.둘째, 인사와 지휘의 문란. 전시에조차 공훈·파벌이 지휘 라인을 흔들었다. 일선 장수의 재량과 중앙의 명령이 엇갈리며 전력은 분산되었다.셋째, 군적(軍籍)의 허위와 훈련 결핍. 문서 속 병.. 2025. 8. 19. 허준과 동의보감 – 세계적 의학서가 된 조선의 보물 조선 중기, 전란과 기근이 반복되던 시대에 허준(1539~1615)은 의학을 책상 위의 지식이 아니라 백성을 살리는 기술로 다시 세웠다. 그의 대표작 〈동의보감〉은 산개되어 있던 의학 지식을 한데 묶어 표준화·체계화함으로써, 조선 보건의학의‘운영체제’를 바꾼 책이었다. 한 권의 의서가 왜 ‘세계적 기록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가를 이해하려면, 조선 의료의 문제의식과 이 책의 설계를 함께 봐야 한다.학문적 갈등의 서막, 조선 의학이 직면한 과제임진왜란 직전·직후의 조선은 약재의 규격·용량, 질병 명칭, 치법의 기준이 서로 달라 지역마다 처방 수준도 들쭉날쭉했다. 의학 지식은 중국의 방대한 전적에 흩어져 있었고, 궁궐·관청·향촌이 취사선택해 쓰는 관행 또한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허준이 본 근본 문제는 “의학이.. 2025. 8. 19. 장영실과 과학 기술 혁신 – 측우기, 혼천의 발명과 과학자의 삶 조선 전기 세종 대의 과학은 단순한 장인의 솜씨가 아니라 국가 운영 시스템이었다. 장영실은 그 최전선에서 “시간·하늘·비”를 재는 도구를 표준화해 행정과 농정, 역법을 바꿔 놓았다. 낮은 신분 출신이었으나 능력으로 발탁되어 기술이 신분을 넘어선다는 전례를 만들었고, 실험·제작·운영이라는 과학의 전 과정을 궁중 조직 속에 정착시켰다.학문적 갈등의 서막, 기술이 나라살림이 되다세종은 한글·음악·의학과 더불어 천문·시계·기상을 국가 역량으로 삼았다. 장영실이 맡은 과제는 ‘지식’이 아니라 측정과 표준이었다. 백성이 쓰는 시간, 관리가 보는 장부, 관원이 올리는 보고가 서로 맞물리려면 누구나 같은 단위로 같은 방식으로 재야 했다. 이 철학이 조선 과학 행정의 출발점이 된다.시대의 처방, 표준과 자동화자격루(自擊.. 2025. 8. 18. 신사임당과 여성 교육 – 예술과 가정교육의 상징 조선 중기, 유교 질서가 일상을 규정하던 시대에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은 예술과 교육, 생활경제를 한 몸처럼 엮어 낸 보기 드문 인물이었다. 그는 화가이자 시인, 서예가였고 동시에 여덟 남매의 어머니였다. 그의 이름은 흔히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불리지만, 그 안에는 예술적 감수성으로 집안을 교육 현장으로 바꾸고, 가정 경제를 설계해 배움을 지속하게 한 능동적 주체의 얼굴이 있다. 학문적 갈등의 서막, 여성 교양과 현실의 간극16세기 조선에서 여성의 교육은 주로 내외·예절·가사의 범주에 머물렀다. 글과 그림의 재능이 있어도 사대부 여성의 공적 무대는 좁았고, 창작은 종종 취미로 축소되었다. 신사임당이 맞선 첫 과제는 재능과 규범 사이의 긴장이었다. 그는 규범을 정면으로 부정하기보다, 가정.. 2025. 8. 18. 퇴계 이황과 성리학 – 학문적 업적과 제자 양성의 이야기 조선 중기는 겉으로는 예제(禮制)와 문치(文治)가 정비되어 안정된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훈구·사림 갈등과 붕당 대립, 관념화된 학문 풍토가 누적된 시대였다. 퇴계 이황(1501~1570)은 이런 현실 속에서 학문을 공론의 수사(修辭)가 아니라 수양과 실천의 기술로 되돌리려 했다. 그의 성리학은 인간의 마음을 철저히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 학문과 정치·교육이 한 몸으로 움직이게 하는 정밀한 삶의 설계도를 제시했다.학문적 갈등의 서막, 관념의 장식에서 수양의 실천으로퇴계가 보기엔 당시의 성리학은 경전 주석의 암송과 논변에 매몰되어 심성의 단련과 일상의 실천을 잃고 있었다. 그는 주자학의 대의(大義)를 한국 현실로 깊이 끌어들이며, 핵심 키워드로 경(敬) 마음을 모으고 스스로를 단속하는 지속적 주의를 세.. 2025. 8. 18.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 – 임진왜란을 예견한 경고 조선 선조 대(16세기 후반)는 겉으로는 태평했지만 속으로는 무너지고 있었다. 붕당 갈등으로 인사와 재정이 마비되고, 군적(軍籍)은 부패로 텅 비었으며, 병농일치의 기율은 해이해졌다. 바깥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해 바다 건너 동향을 노렸고, 북방에서는 여진의 동향이 심상치 않았다. 이때 율곡 이이(1536~1584)는 “국가의 평안은 사람과 제도에 달렸다”는 인식 아래 전면적 국가 경장(更張)**을 촉구했다. 그 핵심이 바로 훗날 ‘십만 양병설’로 불리는 상비·예비 병력 10만 양성 안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훨씬 전, 그는 이미 전쟁을 보았다.학문적 갈등의 서막, 사림의 분열과 북방·해방 정세율곡은 공허한 도덕 담론이 아니라 경세치용(經世致用)세상을 다스리는 실용을 내세웠다. 그는 《성학집.. 2025. 8. 17. 이전 1 ···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