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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와 사육신 사건 – 권력 다툼과 충신의 비극 조선 전기는 겉보기에는 태평한 듯 보였지만, 왕위 계승을 둘러싼 피비린내 나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세조의 왕위 찬탈과 사육신의 순절 사건이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충절과 권력욕이 정면으로 충돌한 비극이었다.어린 임금 단종과 권력의 틈새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병약하여 오래 살지 못했다. 문종 사후 그의 어린 아들 단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겨우 열두 살이었다. 어린 임금은 권력 기반이 약할 수밖에 없었고, 정치는 대신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틈을 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점차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무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규합했으며, 안평대군 등 경쟁 세력을 제거하.. 2025. 8. 17.
정도전과 조선 건국 이념 – ‘조선의 설계자’가 남긴 법과 제도 조선을 세운 이는 태조 이성계였지만,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제도적 기틀을 마련한 인물은 따로 있다. 바로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다. 그는 흔히 ‘조선의 설계자’라 불리며, 유교적 정치질서를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의 사상과 제도는 조선왕조 500년의 안정된 기틀이 되었고,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있다. 고려 말의 혼란과 정도전의 등장정도전이 활동하던 고려 말은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 세력의 부패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권문세족은 권력과 토지를 독점하며 백성을 착취했고, 불교 사찰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거느리며 세속 권력에 깊숙이 개입했다.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백성들의 삶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 2025. 8. 17.
세종대왕과 한글 창제의 비밀 – 훈민정음 반포와 집현전 학자들의 뒷이야기 조선 전기는 표면적으로 큰 전쟁 없이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으나, 백성들은 여전히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다. 지배층은 한자를 통해 학문과 정치를 이어갔지만, 대부분의 백성은 글을 알지 못해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소연조차 하지 못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리하여 1443년, 세종은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문자 체계를 창제하게 된다. 이 사건은 단순한 발명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조선 사회의 근본을 뒤흔드는 혁신이었다. 학문적 갈등의 서막, 집현전과 학자들의 노력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단순히 왕의 독단적 결단이 아니라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이었다. 정인지, 성삼문, 박팽년 등 학자들은 세종의 구상을 구체화.. 2025. 8. 16.
정약용의 목민심서 – 조선시대 행정학의 교과서 조선 후기는 표면의 안정을 뒤로한 채, 지방 행정의 부패와 제도의 경직성이 누적된 시대였다. 수령과 아전 사이의 유착, 불투명한 장부, 무리한 부역과 공납이 백성의 삶을 옥죄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정약용(다산)은 “정치는 백성에게 밥과 숨을 돌려주는 기술”이라는 문제의식을 세웠다. 관료의 마음(心)과 민생의 현장(民)과 행정의 기술(書)을 한 권에 꿰어낸 책, 〈목민심서〉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는 교화나 도덕 설파를 넘어서 실무 매뉴얼이자 정책 설계서로서 조선 행정을 다시 설계한 혁신의 기록이다.학문적 갈등의 서막, 정조의 개혁과 경세학의 문제의식정약용의 사유는 정조 대의 개혁 기운 속에서 단단해졌다. 그는 성리학의 교조화에 갇힌 관념적 논변이 아니라 경세학(經世學) 세상을 다스리는 실제의 학문을 지향.. 2025. 8.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