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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와 위정척사운동 – 보수와 자주, 그 철학의 기반→ 외세 배척과 유교질서 수호를 외친 사상가

by arom100 2025. 9. 14.

조선 말기, 외세의 침입과 개항의 파도가 밀려오던 시기. 누군가는 문을 열어야 한다고 외쳤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닫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항로는 그 중심에서 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켜야 할 것이 먼저다." 유교적 질서와 자주적 정체성을 수호하려 했던 그의 목소리는, 단순한 고루한 보수의 외침이 아니라 철학과 신념이 깃든 외침이었다. 오늘날 세계화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가치와 질서를 지켜야 하는가. 이항로의 위정척사운동은 지금도 묵직한 물음을 던진다.

이항로와 위정척사운동

1. 갈등의 서막 – 조선의 문을 두드린 외세와 내부의 혼란

19세기 중엽, 조선은 외세의 거센 압박과 함께 내부의 모순에 시달리고 있었다. 아편전쟁 이후 동아시아의 지형이 바뀌며, 서구 열강과 일본은 조선에 개항을 요구했다. 이와 동시에 조선 내부에서는 세도정치와 농민 착취, 부패한 관료제도로 인해 민심이 이반 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 조정 내부에서도 개화와 수호의 두 목소리가 충돌했다. 바로 이 시점에 등장한 인물이 이항로다. 성리학에 입각한 강한 유교적 세계관을 가진 그는, 외세의 침입은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닌 국가의 근본을 흔드는 도전으로 인식했다. 그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공한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문을 걸어 잠가야 한다는 주장을 더욱 강력히 펼쳤다. 이항로는 외세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유교적 질서와 왕도정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 보았다. 이 시기의 조선은, 그야말로 전통과 변화의 충돌이 격렬히 일어나던 시대였다. 이항로는 이러한 격변 속에서 위정척사(衛正斥邪)라는 사상적 깃발을 들었다. "정(正)을 지키고 사(邪)를 배척하라"는 이 구호는, 단순히 외국을 배척하자는 의미를 넘어, 조선의 도덕적 중심을 지키자는 의미였다. 그의 등장은 하나의 사상 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이후 위정척사운동은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시대의 경고 – 위정척사의 철학과 이항로의 신념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은 단순한 외국 배척이 아닌, 유교적 가치에 기반한 정치·사회적 철학이었다. 그는 외세와의 교류가 조선의 자주성과 도덕적 기반을 해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개화론자들의 서양 문물 수용론에 정면으로 맞섰다. 특히 서양 종교, 즉 천주교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고, 이는 곧 유교 윤리 체계의 해체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이항로는 자신의 철학을 정치적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 왕에게 상소를 올리며 조정의 경계심을 촉구했다. 대표적인 상소문 중 하나인 ‘만언봉사’에서는 서양과의 통상은 불가하며, 조선은 유교적 질서를 중심으로 내실을 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정치가 진정한 도(道)라 믿었다. 그의 사상은 현실과 괴리되어 있다는 비판도 존재했지만, 당시 조선 사회가 외세에 대한 명확한 대응 논리를 갖추지 못했던 상황에서,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은 강한 이념적 중심이 되었다. 그의 철학은 단지 과거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자존을 지키고자 한 시대적 선택이었다. 이항로의 철학은 후에 면암 최익현, 기산 화서 이기 등의 학자들에게도 계승되며, 조선 말기까지 지식인 사회의 한 축을 형성하게 된다. 그는 단지 한 명의 유학자가 아니라, 시대의 가치관을 수호한 정신적 거인이었다.

3. 숨겨진 이야기 – 이항로를 둘러싼 인물과 논쟁들

이항로의 위정척사 사상은 조선 사회의 보수적 세력뿐 아니라 젊은 학자들과도 깊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개화사상을 지지하던 김옥균, 박영효 등의 인물들과의 사상적 대립은 한 시대의 방향성을 둘러싼 철학적 격돌이었다. 이항로는 개화사상가들을 단순한 신진세력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들을 “사상의 경계를 흐리는 자”로 인식했다. 이는 이항로의 사상이 단순한 보수주의가 아니라, 유교적 질서를 통한 자주적 국가 운영에 뿌리를 두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젊은 지식인들의 눈에 이항로는 시대에 뒤처진 구시대의 인물로 비치기도 했다. 또한 이항로는 당대 왕권과도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울 만큼 강력한 쇄국 정책을 펼쳤지만, 그가 보여준 강권적 통치 방식에 대해 이항로는 경계심을 놓지 않았다. 이항로에게는 단순히 외세를 막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도 도덕과 원칙에 입각한 정치가 필요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사대부적 이상주의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그의 사후에도 이항로의 정신은 살아남아, 위정척사파로 불리는 사상적 계보를 형성했다. 이후 을사늑약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이항로의 사상은 근대화 지체의 원흉이라는 평가와 동시에, 민족적 자존의 상징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함께 받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지키고자 했던 철학적 중심이 조선의 마지막 자존을 지탱했던 정신적 기둥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4. 역사의 교훈 – 이항로가 남긴 질문과 오늘날의 가치

이항로의 위정척사운동은 단순한 외세 배척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어떤 정신적 토대 위에 서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이항로는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지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국의 조건이라고 믿었다. 그런 그의 신념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첫째, 그는 '자주'라는 가치를 강조했다. 조선은 당시 세계 질서에서 약소국이었지만, 이항로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의 철학과 원칙을 지키려 했다. 이는 오늘날 국가 안보, 외교, 경제에서 자주성과 주권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임을 상기시킨다. 둘째, 그는 '도덕과 질서'를 사회 운영의 핵심으로 보았다. 급격한 변화의 시대일수록 중심이 되는 윤리와 철학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은, 현대 사회의 도덕적 혼란과 가치관 혼재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셋째, 이항로는 '변화' 그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무원칙한 변화'를 경계했다. 그는 외세를 무조건 배척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조선의 정체성과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기술 발전과 글로벌화 속에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위정척사 사상이 단지 과거의 유물이 아닌, 시대를 관통하는 철학으로 읽힐 수 있다는 점이다. 변화와 전통, 개방과 수호, 외세와 자주의 균형을 고민해야 하는 지금 이 시대에도, 이항로의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어떤 철학 위에 사회를 세우고, 어떤 가치로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 이항로의 삶은 그 질문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핵심 요약

구성 핵심 요약
갈등의 서막 조선 후기 서세동점의 위기 속에 이항로는 유교 중심 질서와 국권 수호를 위해 '위정척사'라는 사상을 내세우며 지식인의 정신적 구심점이 됨.
시대의 경고 이항로는 외세와의 통상을 강하게 반대하며 유교와 민족의 자주권이 위협받을 것을 경고. 이는 후대 최익현, 기산 김병기 등에게 사상적으로 계승됨.
숨겨진 이야기 이항로는 단순 보수주의자가 아닌, 시대를 꿰뚫는 분석력과 설득력 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학문·정치 양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
역사의 교훈 이항로의 정신은 '보수는 곧 퇴보'라는 편견을 넘어, 지키려는 가치와 실천 철학이 뚜렷할 때 시대를 지킬 수 있음을 오늘날에도 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