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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 조선 후기와 근대 전환기의 영웅적 선택

by arom100 2025. 8. 24.

정치적 갈등의 서막, 대한제국의 몰락과 국권 상실

19세기 후반 조선은 급속히 흔들렸다. 내부에서는 부패한 정치, 외부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거세졌다. 특히 1895년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은 통감부를 설치하고 외교권을 박탈하며 실질적인 식민지 지배를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군대 해산과 고종의 퇴위, 사법권과 경찰권 장악까지 이루어지며 조선은 더 이상 자주국가라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백성들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았고, 민중은 점차 일본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안중근 의사는 백성의 고통을 직접 목도했다. 그는 단순히 일본에 대한 감정적 복수심에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인류의 보편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사명감으로 행동했다. 침략자 일본에 대한 저항은 그에게 ‘살기 위한 몸부림’이자 ‘정의를 위한 실천’이었다. 당시 많은 지식인과 의병들이 저항했지만, 안 의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국제 사회를 향해 조선의 억울함을 알리기 위한 결단을 내렸다.

시대의 경고,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이토는 조선 침탈의 상징적 인물이자 을사늑약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 안 의사는 체포 직후 “동양 평화를 위해 이토를 처단했다”라고 진술하며, 그의 행동이 단순한 암살이 아닌,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의거’였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사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본 법정을 향해 오히려 도덕적 우위를 점하고자 했다. 그는 이토의 15가지 죄목을 직접 낭독하며, 조선의 독립권이 박탈된 사실과 일본 제국주의의 불의함을 조목조목 고발했다. 이 장면은 당시 일본 언론은 물론 세계 언론에까지 보도되며, 조선인의 저항 의지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당당함은 억압받는 식민지 민중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던 일본 제국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상징적 사건으로 남았다.

숨겨진 이야기: 손문과의 동양평화론

많은 사람들은 안중근을 단순한 독립운동가로 기억하지만, 그는 국제적 시야를 가진 사상가였다. 특히 그의 저서 《동양평화론》에는 한·중·일이 공동 협력해 서구 열강의 침탈을 막아야 한다는 구상이 담겨 있다. 이 사상은 당시 중국의 혁명가 **손문(쑨원)**과도 맥을 같이 한다. 학계에서는 두 사람의 직접적인 교류 가능성도 제기된다. 실제로 안 의사는 동양 평화를 위한 공동 은행, 군대 창설 등의 구체적 구상까지 가지고 있었으며, 하얼빈 의거 이후 사형 직전까지 이를 집필하려 노력했다. 그가 말한 ‘동양의 공존과 평화’는 민족주의를 넘어, 초국가적 연대의 가치를 강조하는 선구적 사상이었다. 단순한 무력 저항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의 공존을 꿈꿨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재조명되고 있다.

역사의 교훈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과거에 머무는 사건이 아니다. 그는 단지 조국의 독립만을 외친 것이 아니라, “정의”라는 가치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또한 그가 보여준 도덕적 용기와 철학적 사유는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직면한 여러 갈등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준다. 그는 말했다. “하늘이 내린 사명을 다하면 죽는 것이 한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는 단지 죽음을 각오한 투사의 결의가 아니라, 시대와 생명을 초월한 철학적 선언이다. 이제는 우리가 그의 외침을 현실로 만들 차례다. 독립과 평화, 정의와 실천은 시대를 넘어 현재 우리에게 던지는 물음이기도 하다.

안중근 시대 주요 사건 정리

연도 사건명 핵심 내용
1905 을사늑약 일본, 조선 외교권 강탈. 통감부 설치
1907 고종 강제 퇴위 내정 간섭 본격화, 군대 해산
1909 하얼빈 의거 이토 히로부미 사살, 국제적 이목 집중
1910 한일병합조약 조선 완전 병합, 식민 지배 본격화